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 패잔병 (문단 편집) === 태평양 전선 === 태평양 전선은 후술할 관동군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그나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가장 민주적인 제도에 따르고 인권 문제에 민감했던 [[미군]]이었기에 포로들은 수용소에 있다가 [[전범]]의 경우엔 절차에 따라 [[극동군사재판|사법 처리]]됐고, 일반 포로는 전쟁이 끝나고 본토 일본으로 귀국해 돌아갔다. ---- [[파일:external/www.kuronowish.com/image.jpg]] * '''요코이 쇼이치'''(横井庄一). 1915년 3월 31일 [[아이치현]] 아마군 사오리쵸(현 아이사이시)에서 출생. 원래 성은 야마다(山田)였으나 태어난 지 반년 후에 부모가 이혼하면서 모친 오오시카 츠루(大鹿つる, 1889~1958)의 결혼 전 성인 요코이를 쓰기 시작했다. 패전 당시 계급은 육군 오장[* 伍長, 육군 하사계급에 해당한다.]이었다. 요코이는 [[괌]]의 정글 속에서 스스로 만든 지하 방공호에서 28년간 은둔 생활하던 중 1972년 1월 24일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강가로 갔다가 현지의 새우잡이 어부에게 발견되었고 매스컴에 알려져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죽은 줄 알았으나, 오랜 시간 후에 귀환한 최초의 일본군이었다. 그는 "부끄럽지만 돌아왔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귀국할 때까지 벌벌 떨었다고 한다. 자신은 미군에게 잡혔다고 생각하고 조사가 끝나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에 공포감을 느꼈다고 한다. 요코이의 이 발언은 당시 일제가 전체주의와 [[군국주의]]로 일반인들을 얼마나 세뇌했는지를 후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일본에 막 돌아오고 다시 적응하는 것에 대해 힘들어 했으나, 다행히도 비교적 잘 적응해 고향에서 잘 살았다. 아래에 서술된 오노다 히로에 비해 철저한 생존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옷은 나무껍질로 원시인들이 입었던 누더기 수준으로 기워 만들어 입었고, 게, 생선, 나무열매, 새, 야생동물을 잡아 먹고 수렵을 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을 파서 살았다고 한다. 현지인들과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한 이유는 '포로가 되느니 자살해라' 라는 [[일본군]]의 막장 명령 때문에 처벌받는게 두려워서 그냥 정글 속에서 숨어버린 것이다.[* 포로가 되지 않으면 적어도 가족들은 무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군들 대부분은 부대가 붕괴되면 정글로 도망가면 갔지 항복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전형적인 소시민에 불과했고, 오노다와 달리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정글에서 홀로 생활했으며 군국주의로 인해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피해자로 동정하는 사람도 꽤 많다. 요코이는 자신의 괌 생활을 바탕으로 궁핍했던 생활의 평론가로 전국을 돌며 강연했고, 이후 오노다 히로의 등장 때문인지 관심이 적어졌으나 역설적으로 오노다와 달리 지역사회 정착에 성공했으며 토기를 구워 생활하다가 1997년 9월 22일, 82세의 나이로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noda-young.jpg]] * '''[[오노다 히로오]]'''(小野田寬郞). 항목 참조 요코이와 오노다의 상반된 부분을 살펴보면, 요코이는 [[일본 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다가 입대한 평범한 징집병 출신이었던 데에 반해, 오노다는 장교 계급인 육군 보병 소위 출신으로 [[일본군]]의 막장행각에 대해서도 옳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철저한 [[군국주의]]자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 이전에 어떻게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극한의 상황에서의 행동방식이 철저하게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 그리고 [[1974년]] 12월 [[인도네시아]]의 [[말루쿠 제도]]에 있는 모로타이 섬에서 다카사고 의용대[* 일본군 사상자가 늘어나자 [[군무원]]들을 부대 편성해 일선에 내보낸 것이기에 군인이라 하기엔 애매하다.]로 참전했던 나카무라 테루오(中村輝夫, 1919~1979)가 가장 마지막으로 항복했다. 이 사람은 일본인도 아닌 [[대만 원주민]]이라 일본에서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32년간의 급여와 2계급 특진을 받아 귀향하였다는데 그 32년간의 급여가 계약할 당시의 급여라 몇만 엔에 불과하였다. 기타 일체의 보상금 같은 건 없었다. 이 사람 외에도 일본군을 도왔던 대만 원주민들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 대만으로 송환되었으며, 한족이 아니기 때문에 대만에서도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당시 대만은 독재 국가였으며 정부는 원주민들 신경쓸 틈도 없었다.] ---- 그리고 일부 패잔병들은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해당 국가에 남아 현지인들의 독립전쟁에 가담해 싸운 일도 있는데, 그 사례 중 하나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때 구 일본군 출신자들이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함께 네덜란드군과 싸우기도 했다. 심지어 이들 중엔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거나 강제징집되어 인도네시아로 파견되었던 조선인도 포함되었는데, 바로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 출신인 양칠성(1919~1949)이라는 사람으로,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라는 창씨개명된 이름으로 1942년 일본군에 자원입대[* 씁쓸하지만, 당시 한반도 내의 조선인 청년들은 일본군 입대를 못해서 안달이었다. 양칠성도 56.5대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자원입대한 케이스.] 후 [[태평양 전쟁]]에 투입되어 패망 때까지 자와 섬 포로 수용소 감시원으로 있었다. 허나 패망 소식에도 돌아가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아, Komarudin(인도네시아어로 빛)이라는 이름으로 독립군에 가담해 싸우다 잡혀 1949년에 다른 '일본인' 2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후 인도네시아군 고위 장성이 된 옛 동료들의 노력으로 1975년에 세상에 알려졌으며,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를 외국인 독립 영웅으로 공인하였다. 양칠성은 현재 자카르타의 칼리비타 국립 묘지에 안장돼 있으며, 현재 그의 묘비에는 KOMARUDIN YANG CHIL SUNG, KOREA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있는데 한동안 인도네시아에서는 그의 창씨개명만 보고 일본인이라고 생각해왔고,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독립영웅으로 추서된 뒤에 일본의 유족에게 유골을 전달하는데 야나가와 시치세이라는 일본인만 일본의 유족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일본에서 인도네시아에 와있던 무라이 요시노리, 우쓰미 아이코 교수 부부에게 야나가와 시치세이는 사실 조선인이라고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 이에 이들은 주인도네시아 일본대사관에 찾아가서, '자카르타에 남북한의 대사관이 다 있는데 왜 유족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느냐'고 따졌지만, "'''일일이 그런 거 하기 귀찮다'''"는 답만 돌아왔다고 한다. 이에 빡친 교수 부부가 나서서 야나가와 시치세이, 즉 조선인 양칠성의 존재를 유족에게 알려주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에 돌아온 뒤 교수 부부가 기고한 글을 읽은 양칠성의 조카를 찾아냈고, 동진회 모임에서 함께 지냈다는 동료들로부터 그의 고향이 전라북도 완주군이라는 것도 알아냈으며 1978년에 방한해 그곳을 찾아갔는데 그때 이미 양칠성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이 남아있어 양칠성이 인도네시아 영웅묘지에 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더니, 여동생도 "알려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왜 좀더 일찍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오빠에 대해 자신은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고 죽은 줄도 몰랐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실 전범 항목에서 일본 제국의 경우에 설명된 것처럼 양칠성과 같은 조선인 출신 일본군 군속들(B,C급 전범)에 경우는 일본과 남북한 모두에게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잊히다시피 한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국가기관의 조사와 함께 현대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씩 연구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일본에서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에 대해 활발히 연구되었다. 이 분야의 전문가로 손꼽히는 사람이 일본의 우쓰미 아이코 교수다. 관련 저서로 "적도에 묻히다",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등이 있다. "적도에 묻히다"는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진 김종익씨가 번역해서, 언론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1980년대에 양칠성을 소재로 [[가톨릭]] 어린이 잡지에 <영웅묘지의 꼬마루딘>이라는 소설이 연재되었고 1989년에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현재는 절판되었다. 단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과는 별 상관없이 거의 전적으로 작가의 창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칠성 외에도 [[군무원|군속]] 자격으로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선전 영화를 찍다가 일본의 패전 이후 인도네시아의 독립 운동을 지원한 [[허영(영화 감독)|허영]]이라는 인물의 사례도 있다. ---- 군인은 아니었지만 노동자로 따라 가서 필리핀 동쪽 [[팔라우]] 제도의 [[펠렐류 전투]]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조병기 같은 사례도 있다. 펠렐류 섬 전투가 끝나고 2년 후인 1947년 4월 22일 일본 육군 14사단 2연대 소속 [[https://www2.nhk.or.jp/archives/shogenarchives/shogen/movie.cgi?das_id=D0001100089_00000|야마구치 히사시(山口永)]] 육군 중위가 부하 육군 장병 25명 및 그의 부대에 합류해 있던 해군 45경비대 소속 장병 8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2차대전에서 정식으로 항복한 마지막 장병들이었다.[* 이들 중 마지막으로 살아남았던 생존자가 [[https://www2.nhk.or.jp/archives/shogenarchives/shogen/movie.cgi?das_id=D0001100092_00000|나가이 케이지(永井敬司)]] 씨로, 2019년 말에 타계했다. 살아서 일본에 돌아온 후로는 평생 전쟁을 혐오하며 '''"평화헌법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 펠렐류 섬 전투 후 10년 뒤에 1955년 5월 7일에 조선인 노동자 조병기 씨가 짐승같은 몰골로 작물을 훔치다가 섬 주민들에게 잡힌다. 전투 당시 펠렐류 섬에는 일본 육군 14사단 2연대를 중심으로 일본군 8,000명과 조선인 노무자 3,000명이 있었다. 그중에서 최후의 생존자가 조병기 씨였다. 구출 후 그는 괌과 부산을 통해 고향인 충북 단양으로 돌아갔다. [[펠렐류 전투]] 문서 및 [[https://cafe.naver.com/milframe/611|슈타인호프님의 카페글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